초등학교 때, 나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농구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예쁜 농구부의 매니저를 보고 반해 농구부에 들어간 주인공은, 농구를 난생 처음 해보는 데도 불구하고 농구부 주장과의 대결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게 되며 시작되는 전형적인 소년만화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걸 재미있게 본 나는, 바로 다음 주에 학교 방과후 농구교실에 등록했다.
예쁜 매니저, 숨겨진 재능이란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간 농구 교실은, 바로 첫 수업부터 나를 실망시켰다. 예쁜 누나는 커녕 온통 남자들 뿐인 체육관, 열정의 주장은 커녕 의욕 따윈 없어 보이는 아저씨 선생님. 그리고 처음 만져본 농구공은 튀기는 족족 이상한 곳으로 튕겨 가, 나는 수업 시간 내내 드리블은 커녕 이상한 대로 튀겨서 굴러가는 농구공을 주우러 뛰어 다닐 뿐이었다.
나는 일주일도 가지 않아서 농구 교실을 그만 뒀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한 포기였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만 더 계속해보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확실히 드리블을 익히는 건 남들에 뒤쳐졌지만, 그 이후로는 농구에 감을 잡아서 실력이 일취월장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운동을 하는 재미를 깨달아서 성격도 밝아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 나의 포기를 말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맞벌이 였기 때문에, 나와 대화를 하는 시간도 없었고, 애초에 내가 학교에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시시한 도전이 있었지만, 나는 금방 포기하기를 반복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친구가 없어 하루 종일 혼자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게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턴,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에 빠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전생물이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보잘 것 없는 주인공이 죽고 다른 세상에서 재능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 쉽고 빠르게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잘생긴 외모도, 명석한 두뇌도, 특별한 능력도 없었던 나에게는, 그 꿈만 같은 이야기 속에서 빠져 사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쉽게 사는 걸 바라게 되었다. 놀고 처먹으면서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티비 속 여러 연예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였으니까.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괴로움을 견디거나, 안되는 걸 되게 하기 위해 몇번이고 똑같은 걸 반복하는 과정이, 참 바보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되었을까.
아마 잘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이 글러 쳐먹었다고 혼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나는 책상에서 눈을 떴다. 흰 셔츠의 소매는 침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일어났냐?”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난, 지금 뭐가 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곧 선생님 오니까 이제 좀 일어나라, 집 가야지” 그렇게 말하며, 그 녀석은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주섬 주섬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누구…세요”
나는 잠이 덜 깨서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질문에 내 옆자리의 그 녀석은 ‘뭐야 이새끼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쳤냐?”
천천히,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주변을 살폈다. 내 앞에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애의 뒤통수, 그 너머로 보이는 여러 애들의 머리통과 벽에는 칠판이. 내 왼쪽에는 창문이. 그리고 오른쪽 벽 중앙에 걸려 있는 시계.
“학교네…”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내 옆자리의 이름 모를 녀석은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하며,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미친놈 보듯이 보았다.
“지랄좀 그만하고 가방이나 싸, 집가야지 뭐하냐?”
그 이름 모를 새끼(초면에 무례하긴 히지만, 자꾸 옆에서 시끄럽게 지랄하길래 좀 짜증이 났다) 는 자꾸 옆에서 참견을 놓았다. 안 그래도 지금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아까 급하게 마신 위스키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 지 않네.
뭐야,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만 해도 존나게 피곤했었는데 지금은 왜 또 정신이 이렇게 또렷하지? 세상은 또 왜 이렇게 맑고 밝은거야?
잠에서 막 깨어서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자, 모든 감각이 불시에 깨어나는 듯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내 몸은 이 공간의 모든 감각적 정보를 한순간에 받아들였다.
마치 그 기분은, ‘나라는 존재는 분명히 이 곳에 존재한다. 이것은 꿈도, 환상도 아니다’ 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듯 했다.
나는 지금 내가, 학교에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새끼를 쳐다봤다. “왜, 뭐?” 이제 좀 적당히좀 하라는 그 띠꺼운 표정,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초등학교 때 친구 한명 사귀지 못한 나는, 중학교 시절에도 여전히 친구를 사귀지 못한 채로 체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2학년이 되어서 처음 교실에 등교한 날, 짝꿍으로 만나게 된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는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같이 놀자고 말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었고, 그덕에 유일하게 중학교 시절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래,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은 나의 유일한 친구였던, 이름은…..
“누구세요?”
“와 진짜 미쳤나? 너 뭐, 기억상실증걸렸냐? 이새끼가 자고 일어나더니 아까부터 지랄하네 계속.”
뭐지?
기억이, 안난다.
이상하다, 분명 난 이녀석하고 중학교 때 유일한 친구 사이로 친하게 지냈는데? 고등학교 진학한 후로는… 어쩌다가 연락이 끊겼는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중학교 시절, 아니지 내 인생에서 사실상 유일했던 친구새끼의 이름을 까먹는다고?
그렇게 내가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던 사이에, 교실의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다.
“자 조용~ 오늘은 딱히 전달사항 없고, 청소당번 청소하고 집 가라. 그럼 이상.”
세상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은 그 선생님은, 그렇게 단 한 마디만 한 채로 열려있는 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끔씩은, 어질러진 것을 정돈하기 보단 어질러진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다. 난장판을 어디서부터 정리해 들어가야할지를 고민할 시간에, 그냥 성큼 성큼 들어가서 발에 치이는 것부터 쓰레기통과 서랍 둘 중 어디에 쳐박을지를 고민하는 게 더 빠르니까.
아이들이 대부분 집으로 간 교실에, 나와 옆자리 녀석 둘이서 마지막으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신을 완벽하게 차린 나는, 대충 책상에서 베개로 베고 자던 소설책 한권을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방에 집어 넣고,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신 차렸냐?” 옆자리 녀석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난 진짜 너가 미친놈인줄 알았다. 이상한 책좀 그만 읽어라 나 진짜 소름끼친다” 나와 함께 교실을 나가면서, 그녀석이 한마디를 했다.
이상한 책… 하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곳에 갇혀서 죽어나가는 이야기가 정상은 아니긴 하지.
“근데 진짜 까먹어서 그런건데, 너 이름이 뭐였지?”
나는 담담하게, 그리고 나름 정중하게 물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말하던 그 녀석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니 진심이냐?”
아 잠깐,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아이유?”
‘이윤우 병신아”
“아.”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다, 내 친구 윤우, 이름 초성이 ㅇㅇㅇ이라 핸드폰 메신저에 ㅇㅇㅇ이라고 저장해뒀던 윤우, 메세지 보낼 때, 윤우야 라고 안적고 ㅇㅇㅇ. 라고 적었던 그 윤우.
“미안 윤우야, 다시는 안까먹을게 내가.” 나는 윤우에게 사과를 건냈다. 이 사과는, 다시 태어나기 전인 스물 다섯살의 내가 열…
“근데 우리가 몇 살이지?”
“미친새끼”
그렇게 우리는,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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